<1><브리테니카 사전>
조선 후기인 1781년(정조 5)에 인재양성을 위해 정조의 주도하에 규장각에 마련된 제도.
본래 규장각은 '상이극준봉모훈지도'(上以極遵奉謨訓之道)와 '하이진작성인재지방'(下以盡作成人才之方)이라는 2대 목표하에 설립된 것인데, 초계문신제는 후자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1781년 2월의 〈문신강제절목 文身講製節目〉의 의정(議定)을 통해 그 기초를 닦고 최초로 20명의 초계문신을 선발했으며, 같은 해 〈규장각지 奎章閣志〉 재초본(再草本) 배양조(培養條)로 정리된 후, 다시 1784년에 〈규장각지〉가 완성될 때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초계문신으로 선발될 수 있는 사람은 참상(參上)·참하(參下)의 당하문신(堂下文臣) 중 승문원(承文院)의 분관(分館: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으로서 승문원·교서관·성균관에 추천된 자)인 자로서 37세 이하인 사람이었으며, 40세가 되면 여기에서 벗어났다.
교육과정은 경전류를 강론하는 시강(試講)과 강론받은 것을 기반으로 해서 제술문을 짓는 시제(試製)가 있었다. 시강은 매달 10일 전과 15일 후(뒤에 20일 후)의 월 2회 이문원(摛文院)에서 시행했으며 승지는 이를 감독하여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시강의 교과서는 사서삼경의 칠서(七書)로,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역경〉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강론은 전교과과정을 100회로 나눈 진행표에 따라 시행되었다. 또 강론의 성과는 통(通)·략(略)·조(粗)·불(不)의 4등급으로 평가되었으며 구두(句讀)보다는 문의(文義)에 통달한 것을 우선으로 했다. 시제의 종목은 처음에 논(論)·책(策)·표(表)·배율(排律)·서(序)·기(記) 등 6종류였으나 차츰 그 수가 늘어나서 최종적으로는 30종목으로 정착 규정되었다. 시제의 문체 중 치용(致用)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논과 책이 가장 중시되었다. 교육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 초계문신의 신분 및 경제적 보장 조처가 취해지고, 잡무도 면제되었으며, 왕이 직접 이들을 지도 편달하는 친림(親臨)의 행사도 있었다.
정조는 이 제도의 시행을 통해서 2가지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즉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들을 재교육함으로써 인재를 양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배출하여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당파나 사색 당파의 타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후자의 목표는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단지 정조대의 문화정책의 수행이나 인재의 양성에는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된다.
정조의 개혁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울 만큼 격동적인 것이었다. 여러 학문적 업적과 새로운 학문적 기풍을 마련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또한 백성을 살피며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어버이로서의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정조 사후에 모든 개혁정책이 정지되긴 했지만 조선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조의 개혁은 노론이라는 거대한 산을 완전히 넘지는 못하였다. 탕평책이외의 개혁정책을 통해 노론의 위기나 분열은 있었지만 그 세력을 완전히 혁파하진 못한 것이다. 또 남인과 소론을 등용함에 있어서 그들이 정조의 개혁에 관심을 두었다기 보다는 소외되었던 자기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활로로 인식하여 정조에 동조한 것이 컸으며 벽파에 대적할만한 집단체를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정조 사후에 정조가 이루려 했던 개혁정책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벽파 이외의 당파가 제거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정조의 개혁정책은 정조 사후에 모두 정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만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알아보면서 정조의 개혁 정책이 단순히 왕권 강화만을 위한 개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분제 모순의 완화, 토지소유의 균등, 병농일치(兵農一致), 농공상(農工商)의 균형적 발달, 붕당(朋黨)의 소멸, 부와 권력의 지역적·가문적 편중 지양, 인재등용에서의 실력 우선과 실무능력의 존중,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권력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지대한 역사적 과제는 정조의 치세에서 해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해결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위한 노력을 또한 도외시할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조대의 개혁은 정조 스스로가 말한 「더 큰 개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정조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치권의 안정이었다. 실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정치권 내에서의 개혁반대파의 반발이었다.
이러한 반발을 충분히 예상하던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개혁을 위한 정치권의 정지(整地)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크게 두 갈래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는데, 첫째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 개혁논리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정조는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붕당간의 갈등을 현실적으로는 붕당간의 세력균형, 상호견제를 통해 극복해 나갔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관료들이 정치의 공적(公的) 책임성을 자각하여 붕당의 사적(私的) 동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자각하는 속에서 서로 진정한 화합을 이룸으로써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탕평(蕩平)’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이 정조의 인사 개혁의 한 부분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평책이다. 이렇게 되면 붕당이나 지벌·문벌을 떠나 각자가 가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되며, 국왕은 태극(太極)의 도(道)를 체득하여 각 개인이 가진 다양한 재능을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정조가 생각한 정치운영의 최고 목표는 바로 이러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처럼 기존 집권 붕당을 완전 제거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주도권만 제거함으로써 점차 각 붕당의 공존을 가능케 하면서 한편으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다시 남인으로 주도권을 순환시켜 어느 붕당의 전제(專制)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붕당의 집단성을 서서히 희석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것이 탕평 정국운영의 일차 목표인‘붕당타파(破朋黨)’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정조 자신의 개혁지향적 노선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붕당을 떠나 폭넓게 포섭함으로써 왕권의 절대화와 개혁의 완벽한 추진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것이 정조가 즉위 초년부터 실행해 나간 그의 심대한 구상이었다.
또한 정조가 인사부분에 있어서 주력한 개혁정책이 하나가 친왕(親王)세력의 부식이었다. 규장각(奎章閣)과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의 운영이 그것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다음날 설치가 명해졌지만 본격적으로 조직과 기능이 정비된 것은 동왕 5년(1871) 2월부터이다. 규장각 신하는 명실상부한 국왕의 최고의 측근이자 최고 권위의 문한기구(文翰機構)이며, 또 최고의 요직이기도 했다. 규장각의 신하로 뽑힌 사람들은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그는 규장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고위직에 있었다)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론과 소론출신이었다.
이것은 정조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면서 기존의 집권층 내부에서 인재를 골라 흡수하는 전략을 썼음을 말한다. 기존의 권력구도를 개편하면서도 그 반발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신중하고 적절한 방법이었다. 정조 5년 2월부터 시행된 초계문신제는 친왕세력 육성과 개혁논리의 확산이란 측면에서 규장각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규장각과는 달리 이 초계문신에는 종래 소외되던 남인이나 북인들도 많이 선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산 정약용(丁若鏞)같은 혁혁한 실학자들도 이 초계문신제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고, 정조 말년에는 이 초계문신 출신자들이 조정 고위직의 거의 태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초계문신제의 운영과 관련하여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국왕이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친히 한 달에 한번씩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는 점이다. 즉 초계문신은 국왕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조가 의도한 바는 여기에 있었다. 아직 사고의 유연성이 결여되지 않은 연소한 인재를 뽑아서 국왕이 직접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국왕과 초계문신은 사적으로도 사제(師弟)관계를 맺게 되어 군신간의 결합을 이중으로 견고히 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학문과 정치적 입지를 공식화·표준화하여 국왕이 주도하는 개혁의 논리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우리가 초계문신제가 개혁적 친왕 세력을 육성하는 중요한 통로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정조는 관료제 내부의 권력체계의 개편에도 주력하였다. 당시의 관료조직은 일반적인 임기를 채우지 않더라도 빠르게 승진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몇개의 청요직(淸要職)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이들 관직은 모두 학문적 소양을 중시하는 청직(淸職)이었는데, 이것이 곧 요직(要職)인 점이 조선 중기 이후의 관료제상의 큰 특징이다.
노비 혁파를 구상했던 정조는 신해통공 직후인 15년 3월에 먼저 관노비(官奴婢) 개혁문제를 채제공에게 일임하여 성사토록 지시하였다. 사실 관노비 개혁문제는 정조 치세 24년 동안 8 년·15년·22년 3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논의가 있었다. 관노비 혁파에 대해서 각 붕당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흔히 시파로 분류되던 인물들은 대부분 혁파에 찬성한 반면 노론 벽파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정조대 후반의 시파 대 벽파의 치열했던 정쟁은 이러한 정책적 입장 차이에도 크게 기인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토지제개혁 과 노비해방 등 중요한 정책 현안에 대해 노론 벽파는 줄기차게 반대하였으므로 노론 벽파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제압하느냐 하는 데에 이러한 정책의 성공 여부가 달리게 된 것이다. 이제 개혁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정치력으로 개혁반대론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에 의해 개혁의 마지막 보루로 이루어진 것이 화성의 축조와 화성 상권(商圈)의 육성이었다. 화성의 육성과 성곽의 축조는 단순한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한 조치를 넘어서 조선후기 정치 사회개혁을 가능케 할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정조가 양주(楊州)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한 것은 13년 7월이었다. 이 결정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상소에 여러 신하들이 찬성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영우원 자리가 비좁고 초라한 반면 수원이 봉표(封標)를 해둔 길지(吉地)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가 수원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아버지 묘소를 모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의도도 있긴 했지만 이후 점차 그 구체적인 의도가 드러났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친위 지역화하여 본격적인 개혁을 진행하기 위한 배후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는 수원 읍치(邑治) 이전과 상권부양책의 추진, 화성축조와 장용영(壯勇營) 외영(外營)의 주둔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노론 벽파세력조차도 처음엔 단순한 효심의 발로로 이해하여 이장엔 찬성했지만 이 후 드러나는 정조의 의도에 강한 의구심과 적개심을 품고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화성 축성공사는 18년 2월에 착공하여 20년 9월에 완공되었다. 화성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먼저 군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화성 축성과 함께 진행된 장용영(壯勇營)으로의 5군영 통합, 장용외영(壯勇外營)의 화성주둔과 향군(鄕軍) 편성, 어영청·금위영 재정의 축성 비용으로의 전용(轉用)은 친위군영 강화를 위한 의도가 직접 표출된 것이다. 결국 화성은 정조 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서 기획·건설된것이다.
화성이 갖는 사회적 의미 또한 만만치 않다. 정조는 성장하고 있던 사상들의 경제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는데, 화성 육성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면 이후 사상들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고 이들이 직접 관직에 진출할 소지가 많았다. 경제적 실력을 갖추어간 사상들의 정치참여가 가능해지는 여건이 이러한 정치정세 속에서 마련되어 갔던 것이다. 만약 이들의 정치참여와 세력화가 이루어지면 조선정치는 서양의 절대주의와 흡사한 새로운 국가단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많다. 화성은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전환의 시험대였던 것이다. 정조와 그 측근에 위치했던 개혁론자들의 「화성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조의 구상이 막바지에 심한 반발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먼저 화성의 성곽은 완성되었으나 상권을 부양할 목표로 계획되었던 부호유치 절목부터가 노론 벽파의 강한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벽파정권이 서면서 친국왕세력이었던 남인과 노론의 시파세력이 제거되는 정계개편이 잇다르고 화성을 통한 사회개혁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화성 축조가 완료된 정조 말년에 정조의 통치양상은 사실상 상당한 전제적 양상을 띠었고, 노비해방과 같은 것이 정조 왕정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벽파 세력의 제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럼 왜 정조는 이들을 제압하여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패기있게 추진하지 못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비록 자신의 생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에 책임이 있고, 심지어 그 일부 세력은 자신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와 그 생모 의빈 성씨까지 살해(10년 5월과 9월로 추정하는 부분)하는 데에 가담되었지만 정조는 이 벽파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기간 조선 국가를 좀먹어온 당쟁의 피해와 같은 또 다른 살상의 비극, 갈등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물리적인 조치가 장기적으로는 정치권 전체의 화합과 통합을 해칠 것이며, 이러한 갈등 위에서의 개혁은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고심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적 아픔을 국가적 통합으로 승화하려는 정조의 큰 정치의 비전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서 한 시대를 사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한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국왕으로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고뇌와 인내, 그리고 화합을 위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화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긴 여운과 향기는 정조의 일생이 보여준 이러한 대의(大義)에의 자기 헌신과 개혁에 대한 솔선수범, 그리고 인간과 화합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통찰과 철저한 준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는 이상을 쫓는 군주였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군주였고 불합리에 맞서려 했고 어떤 벽에 부딪쳐도 도망치지 않으려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단어는 없지만 만약 정조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그렇게까지 급격히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 후기의 혼란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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