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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 2011.7.15(금) - 7.20(화) (5박6일)
코스 : 인천 -(선박1박)- 단동 - 환인 - 통화(1박) - 백두산(서파) - 통화(1박) - 집안 -
단동(1박) -(선박1박)- 인천
참가자 : 김성태, 김중재, 이재춘
1. 출발
정말 지긋지긋한 장마는 출발하는 날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집결시간 2시간전인 오후 1시에 집을 나서는데 비가 많이 와 바지가랭이는 다 젖었다. 3명이 1차로 모이는 곳은 1호선 인천의 도원역. 내가 제일 먼저왔다. 바로 다음차와 그 다음차로 성태와 중재가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인천제1국제여객터미날로 갔다. 공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터미널이지만 사람들은 북적북적했다.
연안부두에게 처음으로 만난 일행은 광나루(여행인솔자)를 포함해서 모두 20명이었다. 한시간이상 긴 줄을 선채로 출국절차를 마치고 배에 올라가니 이제사 여행을 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서니 6인실로서 2층 침대 3개와 화장실이 있는 방이었다. 매우낡은 시설에 2층에 오르는 쇠사다리가 흔들거렸다.
배를 한바퀴 둘러보니 시설이 생각보다 아주 열악했다. 부대시설도 식당 한곳, 매점 한곳밖에 없었다. 여행객을 위한 배라기보다 보따리장수를 위한 배로 보였다. 다만 큰 방에 매트리스 한 장씩 차지하고 가는 사람들보다는 우리가 훨씬 나은 방에서 지내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우리 셋은 대학교 1학년 친구로 온 3명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저녁식사도 식당이 좁은 관계로 방송으로 호출하면 가는데, 그곳에서도 또 긴 줄을 서야만 했다. 먹을 만은 했지만 생각했던 수준이하였다. 식사후에도 비가 계속 와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맥주 한잔씩하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2. 단동 도착
창밖을 보니 망망대해였다. 아침을 먹고도 한참 지나서야 항구에 도착하였다. 약 15시간이 걸렸다. 배는 도착했지만 내릴 수가 없다. 입국수속이 밀려 배안에서 기다리란다. 2시간정도 기다려 하선하여 버스로 입국장으로 이동했다.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인 부두를 한참 달려서야 조그만 건물앞에 도착한다. 입국수속에서 나만 별도로 기다리란다. 직원이 내 여권을 가지고 2층사무실로 갔다오더니 10분후에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전에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그놈들은 내 주민번호까지 다 알고 있었다.
마중나온 현지가이드와 버스타고 단동시내로 가면서 바로 길옆이 황금평이라고 설명해준다.
지도를 봐도 이 삼각주는 북한보다도 중국쪽에 훨씬 가까웠다.
시내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허름한 현지식당이었는데 나는 잘 먹는데 친구 둘은 영 못먹는다.
3. 오녀산성에 오르다.
단동에서 오녀산성까지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었지만 길이 구불구불해서 5시간은 달려야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화장실에 한번 들렀는데, 길가의 공동화장실로 푸세식인데 숨막히는 악취와 불결함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 현재는 환인이라는 도시이다.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도망쳐 온 주몽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피성(전시에 피난간 방어성)이 바로 오녀산성이다. 우리의 남한산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이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멀리서 쳐다봐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으니 별도의 성을 쌓지 않아도 훌륭한 성이 되게 생겼다. 해발 823미터, 계단을 숨차게 걸어오르자 정상이 나타났다. 성안에는 궁성터, 거주지터, 연못등 장기간 생활이 가능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보니 환인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이 큰 댐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졸본성의 유적은 대부분 이미 수몰되고 말았다.
4. 통화에서의 첫밤
저녁을 먹고 약 2시간을 더 달려 밤 10시가 넘어 도착한 숙소가 별이 4개인 만통호텔.
각자 룸메이트를 정하고, 배정받은 숙소로 올라갔다. 나는 대학생들중 가위바위보에서 진 친구와 한방을 쓰기로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복도 전체가 악취로 진동한다.
방에 들어가니 악취는 계속되고 있으나, 객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런데 중재와 성태방에 갔더니 방도 좁고 냉장고도 없고 냄새가 더 심했다.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자기로 한 친구가 방을 옮겨간단다. 여자 두분이 배정받은 스위트룸(3인실)을 대학생들을 위해 양보하여 바꾸었단다. 그래서 나는 독방을 썼다.
다음날 아침에 불평을 했더니 가이드들의 답변은 그냥 이해하란다. 이곳은 백두산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석 달 정도만 영업을 하기 때문에 시설개선은 안하고도 배짱장사를 한단다.
내일아침 출발시간은 새벽 5시. 모닝콜 4시. 이건 완전 예비군동원훈련이다. 좀 늦추자고 했지만 안된단다. 더구나 아침도 도시락이란다.
5. 아,아, 백두산
다음날 아침, 비몽사몽으로 호텔로비에 내려갔더니, 일행들이 벌써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현지가이드와 기사도 늦잠을 자고 5시를 넘겨 나타났다.
호텔에서 백두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5시간. 가는 도중에 백두산에서 먹을 또다른 도시락과 물을 하나씩 더 챙겼다. 가다가 한번 휴식할 때 버스에서 내려 목재더미 가운데 자리를 잡고 나눠준 아침도시락을 먹었는데 또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꺼리가 되었다.
백두산 서파산문안내소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가까이 되었다. 여기서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야만 한다. 입장료 100위안, 셔틀버스 85위안. 이날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는데 대부분 중국사람들이다. 최근들어 중국관광객이 많이 온단다. 약 40분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이 백두산 서파 아래 주차장. 여기서 1200여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오르다.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신비한 천지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수시로 변하는 천지의 날씨가 오히려 신비로워 보인다. 다들 감격에 겨운 모습이다. 천지를 배경으로 한컷, 또 조중 경계선인 5호 경계비에 서서 한컷, 기념촬영을 하고 야생화가 핀 풀밭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경계비 바로옆에 신축건물공사를 하고 있었다.
현지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발해가 멸망한 원인이 내부 분열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화산재에 농토가 묻히고, 10여 년 이상 냉해가 계속되어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지경이어서 거란의 침입에 아무런 방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무척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하산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찾아간 곳이 금강대협곡. 지금은 장백산협곡으로 부른다. 대협곡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흘러내려 계곡이 깊게 패인 흔적이다. 하나의 산이 가운데로 쩍 쪼개진 그런 모습이다.
마지막 찾은 곳은 왕지. 왕지로 가는 길 주변은 한 마디로 들꽃 천지였다. 왕지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발생지로 일컬어져 신성한 곳이라 하여 300년 가까이 출입 통제가 되었던 곳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 백성들이 그곳에 무단으로 들어갔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된 기록이 나온다.
6. 국내성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다음날 드디어 고구려가 470여년 동안 수도로 정한 국내성(현재는 집안)으로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는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에 들어가서 보니 비석는 6.39미터의 높이로 엄청나게 컸다.
이 비는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을 시대순으로 기술해 놓았다.
비석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능이 있었다. 능침이 훼손되어 바위들이 무너져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왔다. 능 주위의 둘레석 규모를 보아 능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엄청 큰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에 찾은 곳이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이것은 일종의 가묘이다. 옛날 왕들은 즉위하면서부터 무덤을 조성해놓는데, 무덤이 완성되고도 장수왕은 계속 살아있었다. 장수왕은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겼다. 천도하고도 64년이 지나서 장수왕은 죽었고, 실제로 평양에는 장수왕의 무덤이 따로 있다.
장수왕릉 옆에 세워진 배총(딸린 무덤)은 거대한 고인돌이다. 원래는 장수왕릉을 가운데 두고 네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장수왕의 왕비묘라는 설과 장수왕이 아끼던 장수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의 왕릉의 무인석처럼 왕릉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주장도 있다.
그 다음 본 것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있는 오회분 5호묘였다. 지하통로를 통해 묘실로 들어가는데 보호를 위해 희미한 불빛만 석실을 밝혀놓고 관리인이 손전등으로 벽화를 비추면서 설명을 해 주는데, 역사교과서에서 본 벽화들이 눈에 나타났다. 설명에 의하면 신농씨의 눈에 박힌 보석과 청룡의 입에 물린 여의주로 석실 내부를 밝혔을 거라고 한다.
5개의 묘가 거의 비슷한 건축구조와 벽화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한 개쯤은 양도를 받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국내성의 피성인 환도산성으로 갔다. 다른 산성과 달리 험준하지 않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산성아래의 더넓은 곳에 산성하 무덤군이 널려 있는데, 천오백 개가 넘는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광나루의 고집으로 우리는 북한의 만포마을을 보러 갔다. 조중간 철로가 세군데 있는데 단동과 도문과 이곳이다. 국경지역이라 초소와 공안들 사진은 절대 찍지 말라는 신상당부를 들으며 국경철조망 근처로 갔다. 강건너편의 북한은 오래된 마을처럼 보인다.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다. 서둘러 돌아나왔다.
점심은 압록강변 조선족이 운영하는 불고기집에서 먹었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이라 석쇠불고기에 상추쌈에 소주까지 곁들어 거나하게 먹고는 압록강변에서 잠시 휴식했다.
강변에 있는 국내성벽을 본 후 버스는 단동을 향해 먼길을 출발하였다.
7. 다시 단동에 오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도착했다. '만철호텔' 로 단동역과 함께있는 건물이었고, 겉으로 보기에 규모도 있고 역광장 앞에 모택동 동상이 있어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내부는 '역시'였다. 좁은 실네에 냉장고도 없었고 거기다가 악취에 모기까지 있었다. 성태는 이곳을 '용서받지 못한 호텔'로 명명했다. 몇몇 사람들은 발마사지 받으로 가고 우리 셋은 시내를 한바퀴 돌아 보았다. 밤이 되어 그런지 약간 외곽이어서인지 사람도 상점도 볼거리가 없었다. 호텔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호텔로비에서 마시며 노닥거렸다.
10시가 넘은 시각, 광나루씨가 양꼬치를 사주겠다면서 여행객 모두를 이끌고 가길레, 나혼자 끼었다. 포장마차처럼 된 곳에서 둘러앉아 꼬치와 맥주 한 병씩을 마셨다.
8. 북한을 보며
그 다음 아침에 간 곳은 압록강 마지막 보루인 박작성.
단동에서 압록강 상류 쪽 30km 지점에 있는 박작성은 고구려 때 세운 성으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중국은 이곳을 '호산장성'이라 이름 붙이고, 중국식의 성을 다시 복원해 놓고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98년 한국 역사학자가 이곳에유적을 발굴하여 '고구려의 박작성'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다음에 간 곳은 압록강 단교.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철교인데, 중국측의 절반만 남아있어 이곳을 관광지화 해놓고 있다. 철교앞에 세워진 6.25 참전 기념동상이 있다. 중공군사령관 팽덕회가 가운데 서 있다. 이것을 보는 감정이 묘했다.
다리밑에서 유람선을 탔다. 단교를 강위에서 다시보고, 단동의 고층건물들이 현재 중국의 경제발전상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강건너의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곳이었다. 한곳에서 대비되는 양국의 모습, 서글펐다.
모든 관광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북한식당을 갔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북한의 기쁨조들이 노래와 율동을 했다. 몇 번 보아서 그런지 별 감흥이 나지 않았다.
단동동항 국제여객선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마지막 인사를 노래로 대신했다.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나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리 서로 헤어져가도
해와 별이 찬란한 통일의 그날 우리 다시 만납시다
(후렴)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 메여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9.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배는 올때 탔던 그 배였기에 익숙하였다. 성태와 중재는 서로 침대를 바꾸고(1,2층으로 제일 좋은 자리와 제일 나쁜 자리였다)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한후 갑판에서 바다구경, 일몰구경을 하였다. 올 때에는 비가 와서 선실 밖에 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갈 때에는 제대로 바다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같은 방 대학생 3명과 배에서 파는 오징어구이와 맥주로 이야기 하면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바같이 훤했다. 서둘러 갑판으로 나와보니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구경하고 있었다. 막 해가 수평선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상쾌한 아침공기에 맑은 하늘과 바다경치. 조금 있으니까 큰섬, 작은 섬이 보인다. 백령도인가 했더니 벌써 지났단다. 3시간 더가서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확실히 우리나라와 중국은 시스템이 달랐다. 버전이 다르다는 말이다. 빠른 입국수속으로 빨리 집에 올 수 있었다. 갈 때와는 정반대로 원위치 하였다.
백두산은 꼭 한번 가봐야겠지만 가는 길(과정)이 멀고 험했다. 성태야,중재야,재춘아, 다들 수고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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